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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님 칼럼

 

당신은 무슨 수건을 쓰고 있습니까?

  • 관리자
  • 조회 : 1427
  • 2021.06.30 오후 02:49

수건이라고 하면 무슬림 국가에서 쓰는 터번과 얼굴을 칭칭 감는 히잡을 연상하게 됩니다.

무슬림 여성들이 쓰는 수건은 크게 4가지입니다. “부르카”로, 머리에서 발 끝까지 모두 가리며, 눈 부분은 망사로 가립니다. 다음 “니캅”으로, 부르카와 비슷하나 눈을 가리는 망사가 없습니다. “차도르”는 얼굴만 내놓고 나머지 부분은 외투로 덮습니다. 그리고 “히잡”은 얼굴만 내놓고, 상체만 수건으로 가립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히잡은 역사적으로 지배 계층 여성의 경제와 그 지위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히잡을 착용하지 않으면 남성을 타락하게 하는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히잡에 상대적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으나 이슬람에선 곧 여성의 순결성과 가문의 명예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히잡은 이슬람권 여성이 반드시 착용해야 할 물건으로 취급해왔습니다. 그 원인은 코란에 있습니다. 코란에 여성들은 남자를 유혹할 어떤 살갗도 보이지 말라는 겁니다. 물론 일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유혹이 전적으로 여성에게서만 있는 것처럼 몰아 오늘까지도 수건으로 칭칭 감는 것으로 해결되는 겁니까? 이 수천 년 동안의 그들만의 편견은 오늘도 히잡의 정당을 부여하면서 얼마나 많은 여성을 보쌈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랫동안 ‘수건’이란 뜻은 ‘편견’이요, 이것이 더 무서운 것은 사상화입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방글라데시의 독립전쟁과 함께 20세기 최대의 학살이 1994년에 르완다에서 일어났습니다. 거의 인종적으로도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동화된 두 부족, 후투족에 의한 투티족 대학살은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1분에 7명씩, 3개월에 100만이 도살될 정도의 증오의 대환장 파티였습니다. 투티족 내분을 후투족에 의한 것이라고 지도자들이 선동하자 오랫동안 차별화, 계급화된 그 나라에 살육의 폭발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람 대신에 ‘바퀴벌레’라고 부르며 이 증오의 수건을 쓰자, 일반인, 종교인, 의료인 등을 불문 전방위적인 정글용 낫 등으로 증오의 피를 적셨던 것입니다. ‘인간’이란 이름, 너무 소름 끼치는 학명이 아닙니까? 이데올로기의 종이 되면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편이냐, 네 편이냐가 더 중요하기 시작합니다. 무엇이 옳으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편이냐, 네 편이냐가 더 중요시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수건을 벗으라’고 권면합니다. 그 수건이 무엇일까요? 모세라는 수건을 벗으라고 합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 모세는 430년 노예 생활하던 자기 백성을 해방하였으며, 광야 40년 동안 기적을 보이며, 백성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였고,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모세는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적인 존재였고 전부였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신 34:10) 신적인 존재라도 모세를 하나님 대용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는 전달자, 청지기일 뿐. 모세를 통한 절대자의 약속을, 말씀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모세 자신은 우리와 같이 실수하고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는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애굽 사람을 죽인 살인자입니다(출2:12).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지 않고, 백성이 불순종하자 자기감정을 섞어 반석을 두 번 친 자입니다(민20:2). 바울은 율법이라는 수건을 벗으라고 권합니다. 율법에 대한 두 가지 잘못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와 “율법이 필요 없다”입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죄를 깨닫도록 주셨습니다(롬3:20). 주님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10:4)고 합니다. “마침”이란 율법의 폐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구원받는 길로 인도를 받고, 율법의 최종 목적지인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과 진정한 해방이 도래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율법의 본질과 목적인 사랑을 온전히 받아 누림으로 진정한 율법을 완성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본질을 놓치고, 외형적인 율법만을 따라가면 무거운 자기 행위의 짐만을 지는 것입니다. 음식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습니다. 이방인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절기와 안식일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지키지 못할 때 죽임을 당하기까지 해야 합니다. 이 율법을 지킬 때는 자기의 의를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좌절감으로 절망의 아들이 됩니다. 바로 ‘율법의 수건’을 쓰고 있어서, 그것이 가리키는 ‘본질’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무슨 수건을 쓰고 있습니까? 날마다 강물 같은 성령의 흐름을 놓치면, 전통의 수건, 자기가 익숙한 관습의 수건을 쓰고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아니 내게 유리한지 아닌지만을 따지며 호불호를 결정합니다. 수건에 가려진 눈이 어두운 어리석은 심판자가 됩니다. 뒤에서 속삭이는 사단의 음성을 듣고 편견으로 선악과를 보던 하와는 그 죽음의 열매를 사망의 열매로 보지 못했습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생명과 번영 과일’로 왜곡된 시각으로 봅니다. 당신 뒤에 속삭이는 자가 누굽니까?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합니다. 쉽게 판단하는 데서 나는 수건을 쓴 편견의 종이 되어 사단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가 증오의 수건을 쓰게 하고, 편견의 수건을 쓰게 하며 결국 ‘르완다의 참상’의 저주의 파티를 열게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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