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00여 년 전의 민족의 함성소리 들리는가
3.1운동은 민족의 비폭력 외침입니다. 이 자체가 엄청난 하늘을 진동케 한 소리였습니다. 3ㆍ1 운동은 1년 가까이 계속되었는데, 대체로 3단계에 걸쳐 전개되었습니다.
제1단계는 민족대표 33인이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운동을 점화한 단계입니다. 민족대표 33인은 당초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했다가, 태화관에 모여 비폭력 독립선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민족대표들의 이러한 독립선언은 곧바로 거족적인 항일운동을 불러 일으키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제2단계는 청년, 학생, 교사 등 지식인이 주도한 만세시위가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된 단계입니다. 3월 1일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그 시각에, 탑골공원에는 수천 명의 학생들이 집결해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종로를 향해 시위에 들어갔으며, 여기에 시민들이 합세했습니다. 3단계는 이날 서울뿐 아니라 나중에 농촌지역까지 확대되어 농민운동으로 퍼집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제 잔학한 수탈과 무단통치로 농민들이 눌렸던 울분도 폭발합니다. 일부가 돌멩이, 식칼 등으로 무장하고 면사무소, 헌병 주재소, 우체국, 토지 회사, 친일 지주의 집을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1919년 5월 말까지 세 달동안 전국 230개의 부군에서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1500여 회의 만세시위에 참여했습니다. 그 결과 공식 집계로도 7500여 명이 살해되고 4만 6000여 명이 붙잡혔으며 1만 6000명이 부상했습니다.
그리고 체포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잔학한 고문과 태형으로 옥사했습니다. 이해 10월까지 통계에 따르면 1만 8,000여 명이 구속되어 9289명이 보안법, 소요죄, 내란죄, 살인죄 등으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 때 재판을 받은 사람은 대부분 농민이었습니다. 민족대표들은 최고 3년형을 받았다가 일본의 유화정책으로 대부분 형기 전에 석방되었던 것에 비하면 민초들의 피해는 막대했습니다.
1919년 3월 31일의 정주 시위에서는 28명이 사망하고 99명에 부상했으며, 4월1일의 천안 아오내 장터 시위에서는 20명이 사망하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4월 15일에 화성군 제암리교회에서는 집단 학살로 28명이 사망했습니다. 무기나 죽창을 들지 않는 것으로 인해, 오히려 일본만 자극한 실패한 운동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3.1운동의 결과 일본의 식민정책은 더욱 교활하게 변한 것은 사실입니다. 일본은 겉으로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치안유지법’이라는 악법을 만드는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더욱 더 탄압했습니다. 그래서 3ㆍ1운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강렬한 민족적 기도였다고 봅니다. 하늘을 향한 전 민중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귓전을 울렸습니다.
1차대전 종전전후 전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운동이 크게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3.1운동은 일어났던 것입니다. 3·l운동은 전 세계의 식민지에게 거대한 신음의 나비효과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비폭력, 불복종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기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 지역까지 이 파도는 세계적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국제 사회에 식민 통치하의 한국이 처한 실상 알렸습니다. 한민족 연합 전선 형성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영향을 주어 주체적 독립의지를 보였습니다.
물론 1919년 3.1운동 이후에도 1945년 독립을 맞이하기까지 우리 민족은 일제에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또한 그들에게 희생되었습니다. 그러기때문에 우리가 주체적 역량이 없이 소동만 일으킨 것으로 비하해도 좋을까요? 여기서 독립운동은 일제의 온갖 탄압과 방해 속에서 전개된 것이고 이것이 선포된 것은 그 섭리적 타이밍이 있음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3.1운동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정금처럼 연단하여, 기어코 자주 대한민국을 잉태할 위대한 작업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지속시킨 선열들의 ‘인내’를 배웁니다. 3.1운동으로 독립을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그 정신을 계승받아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이 전개됐고 우리는 일제로부터 해방했습니다. 그 인고의 세월 속에서 이제까지의 봉건국가와는 전혀 다른 독립 대한민국이 발아하고 있었습니다.
한일근대사 500년 동안 한국과 일본이 전혀 다른 길은 걷게 된 결정적 요인은 종교에 대한 양국의 수용 태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제의 무단통치 36년은 강렬한 초대교회의 내세주의 소망사상을 낳았습니다. 고난 속에서 영글어가는 현대 세계사속에서 대한민국이란 이 시대의 소명국을 탄생케 하기 위한 소쩍새의 울음이었던 것입니다.
사상적으로 한국인은 일원구조인데 반해, 일본인은 이원 구조를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가령 일본에서는 ‘신도와 불교의 혼합’이라는 말이 있듯이, 종교를 혼합하거나 절충주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한 개인이 여러 종교를 믿는 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일본에서는 지켜야 할 절대적인 ‘도’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종교는 ‘국체(國體)’를 보전하는 한도 내에서 허용되었습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톨릭를 처음에는 받아들였으나 국체를 흔들 정도로 크게 성장하자 탄압에 나섰습니다.
유교 또한 국체를 보호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였고, 결코 통치 원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서구 제국주의가 동양에 밀려들어오던 19세기 중엽 이후 국체를 보전해야 한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탄생한 것이 전통종교인 신도와 천황제가 결합된 ‘천황제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유교뿐 아니라 그 어떤 종교도 절충주의나 혼합주의는 거의 통하지 않았습니다. 불교와 유교, 유교와 동학, 천주교와 개신교를 동시에 믿거나 절충해서 받아들이는 일은 좀처럼 없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조선은 유교 가운데서도 송나라 때의 주희(1130-1200)가 주장한 주자학(성리학) 이외에는 전부 ‘사도(邪道)’로 정죄되었습니다. 명조의 왕수인(1472-1529)의 학설인 양명학은 조선시대 내내 이단으로 정죄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까닭은 주자학(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온갖 차별(적서차별, 남녀차별, 지역차별, 직업차별, 종교차별)에 기초한 주의였습니다. 이는 차별이나 우열을 인정하지 않는 사민(四民, 사농공상)평등 사상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양명학자(하곡 정제두, 1649-1736)를 이단으로 몰고 간 핵심 요인입니다.
개국을 강요당한 일본은 서구와 전쟁을 피하면서 국체를 보전하고자 했습니다. 반면에 조선은 ‘도(道)’를 국체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한국인에게는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지키고자 한 도가 있었습니다. 군사적 전력이 열세임을 알면서도 프랑스와 미국과 전쟁을 하면서까지 쇄국을 고집한 것도 유교적 민본주의라는 도(道) 때문입니다. 그 ‘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까지 함부로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수백 년 동안 지켜오던 동양의 ‘유교’라는 종교를 외래종교인 서구 기독교로 교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유교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한일합방)는 결론에 도달해야 가능했습니다. 마치 불교의 나라 고려가 유교의 나라 조선으로 교체되려면 불교 때문에 나라를 망했다는 결론에 도달해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개신교가 전해지기까지 조선은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를 억압했고, 양명학도 이단으로 정죄했으며, 가톨릭도 탄압했으며(3대 교난), 동학(東學)도 서학(천주학)이라며 탄압하였습니다. 유교의 깊은 폐해로 일제에 억압당하며 문화적으로 뒤질수 없었던 조선이 쇄국으로 봉쇄상태에서 서양조총을 앞세운 일제에 망한 것입니다.
이와 때 맞춰 마침내 구한말 개국과 더불어 기독교가 들어왔고, 조선인은 급속히 시대정신에 어긋나는 유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유교적 민본주의’의 나라가 ‘기독교적 신본주의’ 나라로 교체됨을 의미했습니다. 과거지향적인 유교, 계급적 유교, 봉건적유교는 결코 기독교와 병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와 달리 기독교는 미래 지향(종말론적 소망),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포용의 논리, 그리고 만민평등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1만세운동은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유교의 나라가 종언을 고한 사건입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교인(또한 천주교인)은 단 한 명도 없고, 그 대신 개신교인이 절반에 가까운 16인(천도교 15인, 불교 2인)이었던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3.1절의 함성은 한국이 유교의 나라에서 기독교의 나라로 대체되었음을 알리는 하나님의 나팔소리였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태화관에서 발아하여 전국적인 농민운동으로 퍼진 것은 민족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울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을 울리는 소리렸습니다. 30년의 고난의 형극을 불러오는 소리였습니다. 이것으로 민족 속의 복음을 정금처럼 제련하는 용광로의 점화소리였습니다. 이제 다시 민족의 기도소리로 이땅과 하늘을 채워야 합니다. 다시 거듭난 대한민국으로 시대의 소명을 다해야 합니다.
주여! 다시 3.1의 함성으로 이 민족을 향한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박인용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