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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님 칼럼

 

'위드 코로나' ?

  • 관리자
  • 조회 : 1240
  • 2021.12.17 오후 06:19

위드 코로나는 코로나19의 완전 퇴치는 힘들다는 것을 인정한 뒤, 오랜 봉쇄에 지친 국민의 일상과 침체에 빠진 경제 회복,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른 막대한 비용 및 의료비 부담 감소를 위해서 일종의 완전 방역 포기정책입니다. 확진자 수 억제보다 치명률을 낮추는 새로운 방역체계로의 전환을 불가피하게 시행하게 된 정책입니다.

2020년 초, 중국 우한에서부터 전 세계로 확산된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실제로 영국이스라엘 등 높은 백신 접종률을 기록한 국가들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관련된 방역지침을 완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영국의 경우 2021719일부터 사회적 거리두기,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 모임 제한 등의 방역규칙을 전면 완화해 위드 코로나 실험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축구경기장에 봇물 터지듯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와 가득 메우며, 마스크 없이 환호성을 지릅니다. 새롭게 형성된 코로나19가 인위적으로 만들었든, 세균실험을 위해 진행중 의도적이든, 실수로 전염이 되었든 이제는 같이 살아야 할 존재가 된 것은 틀림없습니다.

위드(WITH)함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좋은 친구와 함께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좋은 성도, 좋은 동역자와 함께함은 축복입니다. 만남의 설렘보다 헤어짐의 아쉬움보다 더 소중한 것은 누구와 무엇을 함께 하느냐입니다. 함께라는 말은 결코 나홀로 인생의 뒤안길에서 훔쳐보기의 인생이 되선 안됨을 전제합니다. 사람 인()자에 나타난 인간의 존재됨은 상호의존적 협동 관계임을 보여줍니다.

미국 워싱턴의 놀런 클리크에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키가 큰 측백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30년 전 정부의 허가로 벌목꾼들이 숲의 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측백나무도 베어낼 대상이었지만 베기에는 너무 아까워 차마 베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변 나무들을 다 베어내고 나니 이 나무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나무를 다시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앙상한 가지만을 남긴 채 나무는 죽었습니다. 아무리 큰 나무라고 하더라도 혼자 허허벌판의 거센 바람을 맞으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나무들이 잘려나가면서 이끼와 다른 나뭇가지들이 죽어버리자 충분한 수분을 얻지 못한 큰 측백나무도 함께 죽은 것입니다.

이끼도 필요합니다. 심지어 가시나무도 필요합니다.

무엇과 제일 먼저 함께해야 할까요

첫 단추를 잘 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를 끼울 수 없어 다시 풀고, 끼워야 합니다. 순서는 그만큼 중요합니다. 집을 지을 때 기초를 적당히 하고 콘크리트를 올리면 지진에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관계를 맺어야 할 대상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위드 코로나는 아닙니다. 이놈은 우리의 호흡기에 흡착해 폐를 부식시키며, 생명을 앗아가는 것으로 결코 함께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이 불청객은 이미 이 땅에 함께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협동적 관계인가, 지배적 관계인가의 선택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함께 할 수 없이, 싸움의 결말로 건강한 동거(?)를 결정합니다. 이것과 싸우기 위해 스파링상대로 면역주사에 신뢰성이 있다면 맞아겠지요.

이기기 위해 지원군을 받습니다. 우리는 비타민을 복용하며, 물을 많이 마시며, 내 안에 최전방을 지키는 백혈구 용사들이 치열하게 헌신적으로 대적하여 싸워 이기도록 해서 승리해야 삽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을 믿는 믿음의 첫걸음을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를 이길 그 첫관계는 나를 지으신 이와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코로나는 사실상 그분의 우리를 향한 콜링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자각하는가요?

그분과의 관계의 시작은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선 내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내 생각으로 그분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위드는 그분의 음성을 들음으로 그분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교제는 일방적으로 듣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을 통한 위대한 대화는 시작됩니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보다 더한 어려움을 당했던 초대교회는 순수한 말씀 그 자체로 신앙을 지켰습니다. 복음은 코로나를 이기는 그 이상의 힘이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에 교회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그런데 유사행위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코로나의 그늘에 앉아 집에서 TV 시청하듯, 설교를 시청한 것을 하나님과의 교제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내가 순종의 움직임이 있을 때, 비로서 믿음의 열매로 선순환 교통이 있게 됩니다. 예배는 듣고, 삶으로 열매로 이어지는 거룩한 교통입니다.

이것은 마치 학원에서 명강사가 어려운 수학을 쉽게 풀어주는 강의를 듣는 것과 같습니다. 막상 강의를 들을 때는 다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강의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학생은 매번 강의만 듣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아무리 많이 들어도 수학 실력이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직접 해보지 않는 한 선생이 풀어주는 그것은 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뇌의 착각으로 공부가 되는 것처럼 시간만 보낼 뿐입니다. 특히 응용문제가 나오면 거의 손을 놓습니다.

설교를 듣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들을 때는 이해가 되는데 예배당을 나오면 제목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금방 잊어버립니다. 자기의 수고가 없이 편안하게 듣고자 하는 게으름은 악한 것이고 그것은 한 달란트를 숨긴 종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순종으로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이것을 모르고 계속 설교로만 중독되는 것은 교통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도 모르게 헬레니즘 방식에 익숙해서입니다. 헬라 철학자들은 광장에 모여 늘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에 하루를 다 보냅니다. 그것으로 만족하고 스스로 위안을 받습니다.

마치 오늘날 교회예배에서 좋은 설교 한번 듣고 잠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세상에 나가 자기 방식대로 사는 것은 살수록 침투를 허용하는 패배자가 됩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코로나는 수많은 가나안 성도를 양산하며 설교 시청자를 만들어 그리스도인 같은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 관하여 정보를 듣는 사람을 양산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듣고 순종할 때만이 그분을 알고 소통과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11:26). 이제 승리의 삶이며, 무너져 버린 삶이냐입니다.

순종해야 승리 가능합니다.

- 박인용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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