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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님 칼럼

 

겨울 연가

  • 관리자
  • 조회 : 1329
  • 2021.01.10 오후 03:45

""긴 코로나 사태의 끝이 잘 안 보입니다. 터널을 통과할 때 길어도 견디는 것은 반드시 저 멀리 빛의 출구가 있을 것이란 ‘소망’ 때문입니다. 코로나(CRONA)는 왕관이란 뜻입니다. 감히 누가 이 바이러스에게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요? 사실 코로나는 부자나 빈자, 식자나 무식자, 영유아나 장・노년이나 모든 인간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코로나신 앞에 무릎을 꿇고 그가 시키는 대로 복종합니다. 비대면이란 신종 삶의 양식을 생산하며 모든 관계를 종식 시켰습니다. 심지어 예배도 ‘비대면 예배’라는 전대미문의 용어와 방식을 낳았습니다. 옳은가를 구분하기도 전에 코로나 왕 앞에 모두 공포의 아들이 되어 순복합니다. 물론 비대면으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강의나, 통신, 무역까지 비대면 할 수 있고 하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비대면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먹는 것, 부부의 삶 등 반드시 대면으로 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 코로나 왕이 좋은 왕이냐, 나쁜 왕이냐 분별없이 그 기세에 모두 압도당했다는 데 있습니다. 대면으로 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겁니다. 동시에 같은 지체들끼리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를 통해 삶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비대면 영상은 반쪽짜리 예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본질적으로 예배는 ‘보는 것’ 아닌 ‘드림’입니다. 몸도, 마음도, 시간도, 물질도, 나의 재능도 다 주님께 드리는 겁니다. 드림이 없는 예배는 관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축구장에서 뛰는 선수냐 관중이냐의 차이만큼 엄청납니다. 선수는 준비부터 다르고, 땀을 흘리며 최선을 다해 몸을 던집니다. 그러나 관중은 그저 잘하는 선수에게 박수치고, 못하면 야유하는 관람자입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우승의 상금은 선수들이 받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경기 현장에서 공감을 가지고 목이 터져라 응원해도 그 승리의 몫은 내 것은 아닙니다. 1902년 동갑내기로 손양원과 한경직이라는 걸출한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손양원은 일제의 탄압 속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결국 투옥되어 48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또다른 지성적 목회자 한경직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수용하여 절을 하고, 그 시절 신변을 보호하여 그때를 통과해서 장수했습니다. 98세면 손양원의 두 배하고도 2년을 더 산 것입니다. 물론 그 후에 한경직은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템플턴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도 자백하리만큼 그분은 양심적이고, 신앙적 회개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영락교회를 건실하게 목회하고 남한산성에서 비운 삶을 보여주며 소천하였습니다. 두 분은 한국교회가 낳은 걸출한 인물입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손양원은 융통성이 없어 한 국가의 시책에 반대하다 옥고를 치르고 간 ‘꼴통’일까? 지성적이고, 합리적으로 그 시대 상황에서 적당한 타협은 교회를 살리고, 성도를 목양할 기회를 얻고 더 효과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지혜일까? 남미 에콰도르에서 선교한 짐 엘리엇을 아십니까? 기독교 명문 휘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 그가 휘튼대학 2학년 때 기록한 일기장에서 “주님 성공하게 하소서!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것이 아니라 제 삶이 하나님을 아는 가치를 드러내는 전시품이 되게 하소서” 그는 그가 깨달은 말씀대로 에콰도르 와오다니부족에게 그들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며 선교 활동을 같이할 친구를 모읍니다. 네이트 세인트, 피트 플레밍, 로저 유드리언, 에드 멕컬리. 수백 년 동안 외부인, 특히 백인을 적대시하며 죽여온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경비행기를 타고 아마존으로 향합니다. 다섯째 날에 선교본부는 그들에게 연락이 없자 그들을 찾으러 갔습니다. 강변에 텐트를 치고, 복음준비를 하던 그들의 시체를 발견하였습니다. 창과 도끼에 맞아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들의 주머니에 권총이 그대로 실탄이 장전된 채 발포하지 않았던 겁니다. 라이프지와 타임지는 이 사실을 보도하며 분노합니다. 이 독한 원주민에게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가 죽었으니 얼마나 낭비인가? 그런데 그 아내가 말합니다. “낭비라뇨? 내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이 순간을 준비해왔습니다. 내 남편은 이제야 그 꿈을 이룬 겁니다.” 성경책 하나 전달하지 못해도, 남편이 죽은 후 2년 후 1958년 간호사훈련을 받은 그 아내가 죽기를 각오하고 어린 딸과 함께 아우카 부족을 찾습니다. 그들은 남자 어른이 8명에 불과한 56명의 작은 부족이었습니다. 그녀조차 몰랐지만, 이들은 여자는 죽이지 않는 전통으로 5년간 헌신합니다. 안식년이 되어 돌아간다고 하자 추장이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5년 전에 죽은 사람들이 내 남편이고, 나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온 겁니다.” 남편이 선교하러 온 얘기를 듣고 선교사들을 살해한 3명이 주님을 영접합니다. 이들은 10년 후 ‘키모’라는 아우카족 최초의 목사가 되었고, 순교한 선교한 자녀들 중 2명은 아버지가 순교한 팜비치강가에서 ‘키모목사’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이 원주민들이 그 교회 담임목사와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그 마을엔 수백 개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가 19세에 쓴 일기가 공개되었습니다. “나는 오래 사는 삶을 원치 않습니다. 완전하고 풍성한 삶을 원합니다. 바로 주님과 같이...” 복음 때문에 생명을 바친 수많은 카타콤의 순교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대원군 시대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6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일가친척의 6촌까지 처형되어 8천여 명의 기독교인들이 대원군 시대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 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은 30년 동안 2백여 교회를 폐쇄하고 2천여 명의 성도들을 투옥 시키고 죽이고 고통을 가했습니다. 북한에 공산당이 들어 왔을 때, 공산당은 북한에 있는 교회를 불태우고 30여만 명의 교인들을 죽이며 교회를 말살 했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없어졌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짐 엘리엇 - 박인용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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