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라, 아름다워지리라
말할 수 없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말로 먹고사는(?) 인생이 강제적으로 4주의 묵언수행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소통의 어려움으로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 일주일이 지나면서 말을 하지 않으면서 또 다른 유익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감각이 세련되고, 세미해지고, 둔했던 촉감들이 살아남을 느낍니다. 무엇보다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됩니다. 사실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을 뿜어내는 것은 독을 내뿜는 것과 같습니다. 아직 해독되지 않는 감정, 의지는 또 다른 2차 피해를 가져옵니다. 스스로 그것으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착각을 하지만 공해(公害)는 여럿에게 죽음의 그림자를 안깁니다. 그러나 해독된 감정, 의지는 다른 사람을 디톡스(解毒)할 성숙한 에너지가 됩니다. 그런 면에서 묵상은 고민하고, 고난도 경험하고, 인생의 바닥에서 얻는 귀중한 수확이 되기도 합니다. 묵언수행(黙言修行)은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초월적 세계와의 교감을 의미합니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에 더 깊이가 있다는 것도 느낍니다. 사람을 존귀한 존재로 만든 것은 ‘호모사피엔스’라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존재. 생각이 있기에 지식의 축적이 있고, 이것을 다시 되새김질하기에 삶의 지혜가 생깁니다. 생각의 열매로 문명의 발전을 이룹니다. 무엇보다 생각이 있기에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게 되어 사람답게 됩니다. 이른바 공동체의식, 공동의 이익이라는 보편적 선을 낳습니다. 이 생각은 말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물론 ‘생각의 집’을 짓는 것이 모두에게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생각의 가치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어느 쪽을 향해 생각하느냐하는 것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만듭니다. 어느 사람은 자신을 묵상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무능력, 비교의식에서 느껴지는 모욕감, 열등감에 매여 버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집을 무너뜨립니다. 심지어 자신의 기둥까지 파괴함으로 그 붕괴에 자신이 함몰됩니다. 그런데 이른 바 ‘비전’ ‘꿈’을 가진 생각은 창조적 파괴로 새로운 건축이 자아 속에서 이뤄집니다. 자신에게 대한 절망의 바닥에서 새로운 절대자에 대한 희구로 변할 때 비로소 인간은 영성이 계발됩니다. 사람의 본래의 존귀한 속성인 영성은 절대자를 묵상할 때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동일한 하늘을 이고 살아도 성경에 나오는 ‘라반’, ‘야곱’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라반’은 평생 물질적인 이익만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추구합니다. 그에게 돈은 지존입니다. 절대자요, 생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주인이 되는 순간 인간은 물질이하의 윤리성, 영성을 갖게 됩니다. 조카를 속입니다. 조카를 20년간 앵벌이 시킵니다.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딸들도 이용하고, 야곱의 약점은 자신의 이익의 지평을 넓힐 틈으로 활용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법을 어겨 감옥에 갔습니다. 감옥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삶을 곱씹고, 생각하며 후회스런 삶을 바꾸기를 결단한다면 그야말로 교정의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감옥 동기들과 경찰을 피하며, 더 고도화된 범죄기술을 배우는 데 그의 생각을 모으는 순간, 그곳의 삶은 그 인생을 돌이킬 수 없는 질곡으로 빠뜨려 버릴 것입니다. 그 가문의 야곱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인생 20년 결과 물질이 주인이 되어선 보이지않는 섭리의 손길 앞에 결코 형통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청년기, 장년기는 철저히 내일을 위한 물질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도 그것의 축복을 위해서 믿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물질이 400명의 사병을 데리고 야곱의 목을 따러온 20년 원수 형 에서를 보는 순간 하나도 먹히지 않는 것을 경험합니다. 물질이 풀 수 없는 한계상황을 만납니다. 그 때 그는 비로소 위를 쳐다보는 인생, 절대자를 인정하는 인생, 그분의 손길을 내 인생으로 끌어들이는 인생, 그리고 그분을 주인으로 바꾸는 생의 축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 이후 그는 비로소 ‘평안’이라는 선물을 받습니다. 사실 사람은 말하는 것보다 먼저 듣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듣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엔 우리는 모르기에 각 새로운 영역의 전문가 앞에 조아리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어쭙잖은 상태가 되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사람을 만나면 말하기를 경쟁합니다. 어느 순간에 저 깊은 본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비교의식의 소리에 쏠립니다. 경박한 영성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경청에는 겸비함이 있습니다. 경청은 묵상의 첫 걸음입니다. 자연의 소리, 생태계의 소리를 조용히 들을 때 그곳에서 희망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말하게 하고 나는 경청으로 대답하는 것, 이걸 묵상이라고 합니다. 경청의 유익은 점점 감각적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감이 더 살아납니다. 감각적으로 들을 수 있어 자아를 더 깊이 성찰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영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지금 전능자의 부름을 들으십시오. |